손바닥 위의 만다라 ·· 기쁨을 만지는 아침 [고홍곤의 야생화 에세이⑯]
#나팔꽃씨 ·· 고홍곤 야생화 사진작가

#1
먼지속에도 우주가 있듯
꽃씨에서 느끼는 우주의 숨결
한겨울의 아침 산책길은 시린 바람과 정적만이 가득한 길이다.
그러나 그 길 위에서 나는 생애 가장 뜨거운 기적을 매일 마주하며 가슴 뭉클한 감동을 느낀다.
예전에 널찍한 자동차 운전 연습장으로 쓰이던 드넓은 언덕, 그 나팔꽃 군락지에 아침마다 곱게 피어나던 꽃들은 이제 사라졌으나, 그 자리엔 야무지게 여문 씨앗들이 보석처럼 박혀 있다.
나는 아침마다 시간이 되면 기쁜 마음으로 그곳을 산책하며, 동심으로 돌아가 씨앗들을 채집한다. 그것은 단순한 식물의 종자를 줍는 행위가 아니다.
무언가에 바삐 쫓기며 살아가는 내가 잠시 멈춰 서서, 비로소 ‘기쁨과 우주 생명의 근원인 설계도의 정체’를 대면하고 수확하는 성스러운 의식이다.
사람들은 기쁨이 눈에 보이지 않는 관념이라 말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오늘 나는 꿈틀거리는 기쁨을 손바닥 위에 올려두고 직접 만져보았다.
씨앗의 그 단단하고 매끄러운 촉감은 환상이 아닌 실재였다.

#2
겨울바람에 야윈 줄기,
먼지 앉은 씨방마다
보이지 않는 맥박이 고동치며
다시 피어날 새봄날의 약속이여
그 작은 씨앗 속에는 지난여름을 뜨겁게 달구었던 햇살과 나무를 흔들던 바람 소리, 그리고 매일 아침 찬란하게 피어나 다른 생명들에게 활력을 불어넣어 주던 나팔 소리의 환희가 응축되어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모진 풍파를 견뎌낸 수천 년, 수만 년 세월의 결이 그 안에 깃들어 있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다시 환하게 피어날 생명의 꿈틀거리는 숨결이 들려온다.
이 씨앗은 우주의 에너지가 한 점으로 집약된 '기쁨의 결정체'이자, 꽃받침과 꽃잎을 다 버리고 만다라(曼陀羅)를 통해 생애를 완벽하게 갈무리한 '위대한 마침표'였다.
더욱 경이로운 사실은, 이 씨앗을 채취해 추위가 조금 누그러진 2월 전후 양지바른 베란다에 심는 행위가 결코 미래의 행복을 막연히 기다리는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아직 오지 않은 봄날, 지상에서 가장 아름답게 피어날 환희를 지금 이 순간 내 곁으로 미리 가져오는 마법인 것이다.
우리는 흔히 꽃이 피어야만 기쁨이 온다고 믿으며 현재를 저당 잡히곤 한다.
하지만 씨앗을 손에 쥐는 순간, 미래의 찬란한 나팔꽃은 이미 나의 현실이 된다.
기쁨은 도달해야 할 목적지가 아니라, 씨앗을 쥐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의 확신으로부터 시작되는 법이다.

#3
한 알의 마침표가 터져 나와 써 내려간
찬란한 대서사시 나팔꽃의 함성이여
어느새 나의 가슴 속에는 수만 송이의 나팔꽃이 활짝 피어 있다.
손바닥 위에서 달그락거리는 씨앗들의 소리는 내 영혼을 기쁨과 설렘으로 채우는 우주의 합창이다.
나는 나팔꽃씨를 통해 우주의 기운과 연결되어 거대한 에너지를 느끼며, 순환하는 영원 속에서 아버지의 새근거리는 숨결마저 듣는다.
이 작고 검은 마침표는 내게 가르쳐준다. 진정한 기쁨이란 눈에 보이는 화려함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내일의 희망을 오늘 내 손바닥 위에 실체로 올려두는 지혜에 있다는 것을 말이다.
각박한 현실 속에서 진정한 기쁨을 직접 느끼고 만져보고 싶은 이들이 있다면, 지금 자신의 손바닥 위를 가만히 내려다보라.
보이지 않는 미래에 떨기보다, 작더라도 단단한 ‘기쁨의 씨앗’ 하나를 들판에서 먼저 채집해 보자. 그리고 창가에 심어 매일 물을 주고 대화하며 교감해 보자.
그 정성 어린 손길을 통해 기쁨을 미리 가져와 내면에 심을 줄 아는 사람에게, 겨울은 고난의 계절이 아니라 가장 뜨겁게 축제를 준비하는 계절이다.
우리 마음속에 이미 피어난 나팔꽃 한 송이가, 이 시린 세상을 향해 가장 따뜻한 인사를 건네고 있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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