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2(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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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그동안 연재되어오던 온조대왕의 사라진 13년의 역사를 찾아가는 마지막 날입니다.

 

여제 소서노 그리고 비류와 온조 왕자는 마한의 54개국 중 왜 하필 모수국(牟水國)이 자리한 의정부에 들어오게 된 것일까요?

 

하고 많은 땅 중에, 하고 많은 마한의 나라 중에 왜 딱 여기였느냐 하는 겁니다. 그거야 그때 그 시절에 좋은 땅 찾아 나서다 보니 우연히 얻어 걸린 거 아니냐?

 

‘딱 여기’라 하는 표현은 그들의 정착과정이 의도적이었다는 말인데, 그런 태도는 결론을 의정부에다 모든 걸 억지로 갖다 붙이려는 무리한 해석 아니냐?

 

뭐 그런 의심의 눈초리도 충분히 이해합니다만 2만여 명의 유민을 데리고 이동할 적에 무계획적으로 움직인다는 것이 가능했을까요? 전 그럴 수 없다고 봅니다.

 

정확한 정보와 사전 점검 없이 그 많은 사람들을 움직인다는 것은 엄청난 손실과 무모함에 따른 반발을 감내해야 하기 때문에 아무리 많은 돈을 축적하고 강력한 카리스마로 집단을 이끄는 소서노 여제라 하더라도 감히 엄두를 낼 수 있는 일은 아니었을 겁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정확한 사전 정보를 가지고 움직였다고 밖에는 판단할 수 없는 건데요. 도대체 누가 그런 정보를 주었을까요?

 

이런 고급 정보는 누군가가 좋은 땅을 찾아 나선 선례가 있을 때만 가능한 건데 그들은 누구였을까요?

 

이 사건을 풀기 위해서는 동이족(東夷族) 중에서 래이족(萊夷族)에 대한 해석이 필요합니다.

 

래이족(萊夷族)은 중국 산동성에 선재하던 동이족들을 말합니다. 래이족(萊夷族)은 춘추전국시대 초기에 제나라에 의해 산동반도 동쪽으로 밀려났지만 상고시대에는 하남성 동부, 강소성과 안휘성 북부 등 산동반도 인근의 모든 지역을 망라하는 강력한 세력을 나타내는 말이었습니다.

 

좀 더 확대 해석하면 산동반도에 사는 동이족(東夷族)의 다른 말이라고 보셔도 무관한 내용이죠.

 

제나라가 본래 래이족의 나라이다.

『관자』 춘추시대 제(齊)나라의 사상가 ·정치가인 관중(管仲:?~BC 645)이 지은 책

 

래인(萊人)이라는 명칭은 원래 이들이 소맥(밀)을 키운다는 데서 연유하였다 하니, 래인(萊人)은 최초로 보리나 밀 등 맥을 발명한 사람들이었던 겁니다. 즉, 농경사회를 주도한 세력이라는 말이 되는 거죠.

 

그러나 진정한 본뜻은, 삼신(三神) 사상에 따라 신선이 사는 신성한 산인 봉래산(蓬萊山)·방장산(方丈山)·영주산(瀛洲山) 중에서 봉래산(蓬萊山)을 섬기는 부족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래국(萊國)의 경제와 문화는 상당하게 발달되어 있었는데요. 무엇보다 해안가에 위치하여 물고기와 소금이 풍부하였고, 광업용 제철 산업도 발달했으며, 문화 방면에서도 래이족의 음악을 래악(萊樂)이라고 부를 정도로 유명했습니다.

 

이 래이족(萊夷族)에서도 주목해야 할 부족이 있는데, 그들이 누구냐면 소씨 성(蘇姓)을 가진 부족입니다. 래이족(萊夷族)의 본뜻이 봉래산(蓬萊山)을 섬기는 부족이라고 했잖아요.

 

그 중에서도 소국(蘇國)의 사람들은 봉래산(蓬萊山) 아래에 살면서 ‘소도(蘇塗)=봉래산(蓬萊山)을 지키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소풍혈족(蘇豊血族)인 이들이 BC 567년에 제나라 24대 군주인 제영공의 침입을 받아 소풍(蘇豊: 복해(復解: 적제축융(赤帝祝融)의 다른 이름. 기원전 4241년 풍주 배곡에 도읍을 정하고 전국토에 무궁화(蘇)를 심어 성을 소(蘇)라고 함)의 61세손, 기원전 2392년 소성(蘇城: 지금의 길림성)의 하백(河伯)에 봉血族)해진 인물) 혈족(血族)이 산동반도를 떠나 덕적도를 거쳐 인천 소래포구(蘇萊浦口)로 들어옵니다.

 

바로 이 사건 때문에 ‘소(蘇)씨 성(姓)을 가진 래이족(萊族)=소성족(蘇城族)이 들어온 곳’이라는 뜻의 소래(蘇萊)라는 지명이 인천에 만들어지게 되는 거죠.

 

그렇게 한반도로 유입된 소풍혈족(蘇豊血族) 중 일부는 미추홀(인천)에 남고 또 다른 세력은 농사짓기 더 좋은 땅을 찾아 동쪽으로 동쪽으로 나아가게 되는데요.

 

이때 무얼 보고 움직인다고 말씀드렸죠? 고인돌, 고인돌이 많은 곳을 찾아 움직였던 겁니다. 고인돌이 있는 곳은 반드시 물이 있고 열매가 많으며 동물을 쉽게 사냥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죠.

 

거기에 덧붙여 소풍혈족(蘇豊血族)은 신성한 장소를 찾으려고 노력했을 겁니다. 신선이 사는 신성한 봉래산(蓬萊山)을 말입니다. 왜냐고요? 그들은 소도(蘇塗)를 지키며 살던 사람들이니까요.

 

가는 곳마다 일부의 사람들은 그 곳에 정착민이 되고 좀 더 좋은 땅을 찾고 싶은 사람들은 또 다른 땅을 찾아 나서게 됩니다. 그래서 부천을 거쳐 양주를 거쳐 포천을 거쳐 한반도 동남쪽으로 내려가게 되죠.

 

아니 어떻게 그런 그림이 나오냐고요? 아까 제가 소래(蘇萊)라는 지명이 왜 만들어졌다고 했습니까?

 

‘소(蘇)씨 성(姓)을 가진 래이족(萊族)이 들어온 곳’이라고 말씀드렸죠?

 

이 소래(蘇萊)라는 지명을 따라 역사의 길을 걸어보시면 왜 그런 그림이 나오는 지 알 수 있습니다. 인천에 소래포구(蘇萊浦口)가 있고, 인천과 부천 사이에 소래산(蘇來山)이 있고 뜬금없이 양주에 소래산(蘇來山)이 있습니다.

 

그리고 고구려 때 매소현으로 불리던 의정부를 신라 경덕왕 때 내소군(來蘇郡)라는 이름으로 고쳐 부른 걸 보면 여기도 왔었다는 이야기가 되는 거고요.

 

그 바로 윗동네 포천에 소흘읍(蘇屹邑)이 있고, 신라(경주) 지역에 존재했던 진국 6촌 중 돌산 고허촌(高墟村)의 촌장을 일컬어 소벌도리(蘇伐都利)라 불렀으니 당연히 그런 그림이 나올 수밖에요.

 

후에 이 소벌도리(蘇伐都利) 소(蘇)씨는 진주(晉州) 소(蘇)씨와 경주(慶州) 최씨(崔氏)로 정착된 걸 보면 그 출발과 종착점이 어디인지 추측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럼 그들은 왜 북쪽으로 안가고 남쪽으로 내려가게 되었을까요? 그 의문의 해결은 매우 간단합니다.

 

북쪽은 고조선시대부터 확고하게 나라의 형태를 갖춘 세력이 이미 버티고 있었기 때문에 감히 엄두를 낼 수 없었던 것이죠.

 

지명과 인물에서 소(蘇)라는 글자가 사용된 내용을 추적하다보니 이쯤에서 소(蘇)를 사용했던 중요한 인물 이야기 하나를 소개해야 할 거 같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파소(婆蘇). 파소(婆蘇)가 누구냐?

 

신라 첫 번째 거서간 박혁거세 어머니이자 북부여 5세 동명성왕 고두막한 단군의 따님이시면서, 백제를 세운 소서노가 북부여 6세 고무서 단군천제의 둘째 공주이니 직계 언니뻘 되시는 분인 것입니다!

 

아래의 글은 바로 박혁거세의 어머니 파소(婆蘇)의 신라 진출 이야기입니다.

 

斯盧始王仙桃山聖母之子也 昔有夫餘帝室之女婆蘇 不夫而孕 爲人所疑 自嫩水逃至東沃沮 又泛舟而南下抵辰韓奈乙村 時有蘇伐都利者 聞之 往收養於家 而及十三 岐祥然夙成有聖德 於是辰韓六部共尊爲居世干 立都徐羅伐 稱國辰韓 亦曰斯盧 

斯盧 (사로)의 始王(시왕)은 仙桃山(선도산)의 성모의 아들이다. 옛날 夫餘帝室(부여 제실)의 딸 婆蘇(파소)가 있었는데 남편없이 아이를 배었으므로, 사람들의 의심을 받아 嫩水(눈수: 흑룡강성에 인접한 송화강의 지류)로부터 도망쳐 東沃沮(동옥저)에 이르렀다. 

또 배를 타고 남하하여 辰韓(진한)의 奈乙村(나을촌)에 와 닿았다. 이때 蘇伐都利(소벌도리)라는 자가 있었는데, 그 소식을 듣고 가서 데려다 집에서 길렀다. 

나이 13세에 이르자 지혜는 빼어나고 숙성하고 성덕이 있는지라, 이에 진한 6부의 사람들이 존경하여 居世干(거세간)으로 삼고, 도읍 徐羅伐(서라벌)을 세우고 나라를 辰韓(진한)이라 칭하고, 또한 斯盧(사로)라고도 하였다.

桓檀古己 - 太白逸史 高句麗國本紀 231p ~ 232p

 

읽어보니 이 분 때문에 신라가 세워지는군요. 근데 재밌는 건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파소(婆蘇)라는 이름에 소(蘇)가 들어간다는 거.

 

고허촌(高墟村)의 촌장 소백손(蘇伯孫: 기원전 240년에 태어났는데, 소국(蘇國)이 망하자 신하들을 이끌고 경주 형산(兄山)으로 내려와 후진한주(後辰韓主)로 즉위하였다고 함.) 5세손 소벌도리(蘇伐都利)가 파소(婆蘇)의 남하를 그렇게 좋아했던 이유가 단지 북부여 5세 동명성왕 고두막한 단군의 따님이어서가 아니라, 파소(婆蘇) 또한 같은 소(蘇)씨의 피를 가지고 있는 혈족이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그런데 이 루트를 그대로 따라 두 번째로 들어온 부족 사람들이 있으니 그들은 바로 요동반도가 바라보이는 산동성 동북 연태를 기반으로 한 모국(牟國) 사람들입니다.

 

古有巢氏治石婁山,即牟婁也,本牟夷國”

옛날 유소씨(有巢氏)가 다스리는 석루산(石婁山)이 있었다. 즉 모루(牟婁)이다. 모이국(牟夷國)의 근원이다.

<로사(路史)>

모평에 모산이 있다. 산은 양산이고. 산세는 평평하고 넓어 모평이라 하였다."고 하였다.

모산현(牟山縣)이 있는데, 수나라 때 생겼다. 성은 지금의 산동 안구현 서남쪽 모산 북쪽이다. 후에 안구安丘라 하였다.

<수서지리지(隋書地理志)>


“모자국(牟子国)은 축융(중국 신화의 삼황오제 가운데 하나이자 불의 신)의 후손으로서 이후 그것 때문에 성씨를 삼았다.”고 한다. 

모자국이 멸망당할 떄 수도는 모평(牟平)이 되었다. 나라가 망한 후 그 후손이 나라 이름을 따라 모씨(牟氏)라 불렀다.

『성씨고략』, 『원화성찬』, 『풍속통의』

 

다른 이름으로 래모국(萊牟國), 모이족(牟夷族), 모족(牟族)이라고 불리는 이들은 BC 409년 춘추전국 말기에 노나라와 제나라의 동이족 말살정책에 버티지 못하고 소풍혈족(蘇豊血族)이 이동했던 경로를 따라 미추홀 소래포구, 화성, 전북 고창 지역으로 유입되죠.

 

그렇게 해서 단군시대 때부터 내려와 한반도에 가장 먼저 자리 잡은 토착 세력인 한(韓)족, 소씨 성(蘇姓)을 가진 래이족, 2차로 유입된 모이족(牟夷族: 모씨 성을 가진 래이족)이 합쳐진 형태로 나라가 세워지는데, 인천과 부천 지역에 우휴모탁국(優休牟涿國)=우체모탁국(優體牟涿國), 양주 의정부에 모수국(牟水國), 이천에 자리모노국(咨離牟盧國), 전북 고창에 모로비리국(牟盧卑離國)이 바로 그것입니다.

 

마한에 존재했던 이 4개의 나라를 가만히 보시면 전부 모(牟)가 들어간다는 공통점을 발견하시게 될 겁니다. 그 후 모족(牟族)은 함평(咸平) 모(牟)씨로 정착이 됩니다.

 

그러니까 전체 정리를 해보면 의정부는 ‘소도(蘇塗)=봉래산(蓬萊山)을 지키는 일을 하는 사람들’인 소래족과 래이족을 대표하는 모족이 만나서 의정부 동쪽(민락동, 낙양동, 용현동)에 모수국(牟水國)을 세운 거네요.

 

모수국(牟水國)을 세운 거기가 어디냐고요? 그건 두말하면 잔소리라니까요! 의정부시 자일동 41-6번지 귀락마을과 낙양동 오리골이라고 제가 몇 번이나 말씀드리지 않습니까!

 

그 고인돌 많은 동네.

소도(蘇塗)의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는 곳.

 

신라 경덕왕이 고구려 때 매소현이라 부르던 의정부를 굳이 내소군(來蘇郡)라 고쳐 부르며 소(蘇)씨 성(姓)을 가진 래이족(萊族)이 거쳐 갔다는 것을 지명으로 남긴 지역.

 

소흘읍(蘇屹邑)이라 해서 소도(蘇塗)를 지키던 소래족과 관련된 지명이 지금도 그대로 남아있는 그곳.

 

상황이 이렇다보니 의정부 모수국(牟水國)은 그쪽 업계에서는 제법 소문이 난 루트이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려고 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군침을 흘릴 수밖에 없는 건국(建國) 1번지였던 셈이죠.

 

그래서 그렇게 나침반을 이용한 것처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소서노 여황제와 비류, 온조왕자는 마한의 54개국 중 그 많은 후보군들을 물리치고 모수국(牟水國)이라는 세 글자 네비에 찍고 바로 찾아올 수 있었던 겁니다.

 

박혁거세 파소의 남하루트.png

 

옛 진한과 번한 사이에 있는 바다에서 가까운 외진 땅, 패대 지역(浿帶, 패수와 대수지역, 지금의 하북성(河北省) 난하(灤河 ) 부근) 어하라(於瑕羅)에서 이 정보를 들은 여제 소서노와 비류온조 왕자는 침을 꼴깍꼴깍 삼키면서 백가제해(百家濟海), 즉 돛을 단 범선(帆船)인 박(舶)이라는 대형 선박을 앞세우고 한달음에 달려왔던 것입니다.


 

【약력 소개】

교육학박사.

현) 세한대학교 사회복지상담학과 교수

현) 전국지명밟기운동본부 대표

저서: 『역사소년 신새날』, 『십대토론』, 『행복한 수다가 치매를 예방한다』

 

※ 본 기고문은 통통미디어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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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명박사의 지명밟기] ㉚ 의정부 모수국이여, 부활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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