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2-11-20(일)
 

  한산(漢山: 오늘날의 서울, 경기 지역)땅에 다다른 비류와 온조 일행은 안성천변(安城川邊)을 타고 부아산(負兒山)에 올라서 도읍지로 적합한 땅을 찾았다... 여기에 등장하는 ‘부아악(負兒嶽)을 조선시대의 초기 석학(碩學) 서거정(徐居正)이나 경서에 밝았던 조선후기의 학자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도 또 경기도 광주지방을 백제의 첫 서울이라고 주장하는 여러분 모두가 하남(河南 : 한강남쪽)에서 부아산(負兒山)을 찾은 것이 아니고 한강의 북쪽 하북의 북한산(北漢山)에서 찾았다. 즉 삼각산(三角山)의 인수봉(仁壽峰)을 삼국사기의 기록인 부아산(負兒山)으로 보았다. 그리고 그 같은 사실을 모든 문헌이 그렇게 실었다. 

  “부아산(負兒山)은 인수봉(仁壽峰)의 옛 이름이라고” 또 한산(漢山)에는 부아산(負兒山)이라는 산이 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고까지 하였다. 

  그러나 위의 말은 아주 잘못된 것이다. 부아산에 대한 결론부터 말하면 다음과 같다. 경기도 용인군에 부아산이 존재한다. 더욱 정확하게 말하면 부아산은 용인군의 기흥읍(器興邑) 지곡리(芝谷里)와 남리와 서리의 경계에 있는 산이다...(중략) 

  간단한 반론으로 만약 삼각산(三角山)의 인수봉(仁壽峰)이 부아악(負兒嶽)이라면 한강이 인수봉의 북쪽에 있어야 된다고 보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삼국사기에 남한은 한강의 남쪽을 가리키는 말이고 또 [북대한수(北帶漢水: 북쪽으로 한강이 띠를 둘렀다는 뜻)]가 남대한수(南帶漢水)로 고쳐 써야 되는 것이 아닌가?

-‘백제(百濟)의 첫 서울은 직산지방이다’  오세창-

 

신동명s.jpg

위의 글은 천안 향토사 학자 고(故) 오세창(吳世昌, 1930-1991. 천안여상 국사과 교사로 재직) 선생께서 1987년 『향토연구』 제1집에 『삼국유사』 이후 지난 7백여 년 간 논란이 되어 온 하남위례성이 곧 직산위례성이라는 주장을 발표한 내용입니다.

 

서두에 미리 밝히지만 그동안 우리가 발굴해온 의정부의 ‘이성산성’ 중심의 역사는 ‘하북위례성’ 역사로 온조대왕의 사라진 13년 역사를 중심으로 다루는 것이기 때문에, 고 오세창님의 글 중심에 사용되는 하남위례성이 초기 위례성이네, 직산위례성이 초기 위례성이네 하는 논란과는 멀찌감치 떨어진 위치에서 여유롭게 바라보는 입장이라는 것을 미리 적시하고 시작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논란에 끼어들게 되는 이유는, 하남위례성이 어디인지를 밝혀야 더불어 하북위례성이 정말 의정부라는 것을 명확히 할 수 있기 때문에 이글을 통해 약간의 수고를 보태려는 의도가 있습니다.

 

이 논란의 시작은 삼국사기에 실린 아래의 글 때문입니다.

 

十臣諫曰. 惟此河南之地, 北帶漢水, 東據高岳, 南望沃澤, 西阻大海, 其天險地利, 難得之勢. 作都於斯, 不亦宜乎.

열 명의 신하가 간하였다.

“이 강의 남쪽 땅은 북쪽으로는 한수(漢水)를 띠처럼 두르고 있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을 의지하였으며, 남쪽으로는 비옥한 벌판을 바라보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에 막혔으니 이와 같은 지세의 험준함과 이점은 얻기 어렵습니다. 여기에 도읍을 세우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삼국사기』 백제 본기 온조 왕조-

 

그 중에서도 “이 강의 남쪽 땅은 북쪽으로는 한수(漢水)를 띠처럼 두르고 있고”라는 대목은 천안 향토사학자 오세창님처럼 간단한 반론으로 ‘만약 삼각산(三角山)의 인수봉(仁壽峰)이 부아악(負兒嶽)이라면 한강이 인수봉의 북쪽에 있어야 된다고 보아야 한다.’라는 해석이 성립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부아산에 대한 결론부터 말하면 다음과 같다. 경기도 용인군에 부아산이 존재한다. 더욱 정확하게 말하면 부아산은 용인군의 기흥읍(器興邑) 지곡리(芝谷里)와 남리와 서리의 경계에 있는 산이다.”라는 이야기로 연결이 되고,

 

“비류와 온조일행은 안성천변(安城川邊)을 타고 부아산(負兒山)에 올라서 도읍지로 적합한 땅을 찾았다.”라며 용인에서 비류와 온조 왕자가 안성 쪽을 내려다보다가, 직산에 하남위례성을 세웠다라는 이야기로 발전이 되어, 

 

그나마 간신히 역사적 사료의 내용을 정확히 간파하고 한강 이북에 하북위례성이 있었다고 비정한 조선초 석학 서거정 선생과 다산 정약용 선생의 업적마저 부정하는 사례로 이어지는 위험한 상황이 전개될 수도 있기 때문에 신동명 박사는 이번 글을 통해 명확히 종지부를 찍어놓으려고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신박신박 신동명 박사님은 이런 논란을 잠재우고 자장자장 우리 아가 같은 이론을 제시할 수 있으시다는 건가요?

 

참나 그런 거라면 당근 빠따죠. 안 그러면 이야기를 애초 시작도 안 할 사람입니다. 신동명 박사는. 

 

자 그럼 시작해 볼까요? 신동명박사의 해체 쑈~쑈~쑈.

 

1918년 지도-한강으로 표시.png
조선총독부에서 1916년에 만든 의정부 고장 1:5만 축적 지형도. 경원선 철도가 보이고 중랑천을 한강으로 표기하고 있다. 1916년에 측량 18년에 발행. 본디 지도에는 한자로 적혀있다.

 

이 논쟁을 출발하는 문구가 뭐라고 했습니까? “이 강의 남쪽 땅은 북쪽으로는 한수(漢水)를 띠처럼 두르고 있고”라는 문구라고 말씀드렸죠. 그런데 이 논쟁의 마침표도 바로 이 문구에 있습니다.

 

왜냐고요? 핵심의 내용만 해결하면 만사 OK. 쾌도난마(快刀亂麻)가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자 하나씩 풀어나가 볼까요? 첫 번째 과제를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제시한 저 위의 지도에 보시면 의정부 중랑천이 ‘한강(=한수)’이라고 이름으로 쓰여 있는 거 보이시죠!

 

와우~. 조선총독부가 조사한 지도에 의정부 중랑천을 ‘한강’이라고 표기했다고? 수탈을 목적으로 작당하고 만든 지도에 중랑천이 한강이라고 쓰여 있다는 것은 오랜 옛날 의정부 중랑천은 ‘한수’로 불렸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대목이 됩니다.

 

그리고 그 위에 양주군이라고 써 있는 게 보이시나요? 그쪽이 북쪽입니다. 그리고 맨 밑에 빨간 동그라미 안에 ‘회룡골’이라는 쓰여진 곳이 남쪽이고 그 회룡골 밑이 북한산(삼각산) 인수봉입니다.

 

여기서 살짝 우리가 감을 잡아야 하는 것이 북쪽으로는 한수(漢水)를 띠처럼 두르고 있는 모습 보이시죠. 한강이 의정부를 휘감고 있는 모습.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풀리는 문제가 하나 있죠! 다름 아닌 ‘이 강의 남쪽 땅’이라는 지역입니다. 어딥니까? 의정부 회룡골이 되는 거죠.

 

그러니까 이렇게 되면 이 지도는 오세창 선생님의 주장에 정확히 반대(反對)가 되는 증거이면서 삼국사기의 내용에 정확하게 부합하는 자료가 제시된 셈입니다.

 

그럼 이런 좋은 기운을 받아서 두 번째 과제를 풀어보도록 할까요?

 

오세창 선생님은 비류와 온조가 올라갔던 부아악이 용인에 있다고 하시면서 인수봉을 억지로 부아악 또는 부아산으로 만들어 호칭했고, 서거정과 정약용은 용인의 부아산이 있는 걸 알지 못 했다고 지적하는 부분이 나옵니다.

 

그런데 죄송하게도 아래의 제시된 지도를 보시면 버젓이 인수봉이 ‘부아악’으로 불렸다는 걸 증명하고 있습니다. 삼각산 앞에 ‘부아암’이라고 쓰여진 글자 보이시죠!

 

여지도-인왕산.png
여지도(輿地圖): 1789년에서 1795년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 한양도성도 및 조선 군현지도, 조선전도, 그리고 천하도지도(天下都地圖)를 망라한 지도책. 2008년 12월 22일 보물로 지정되었다. 채색 필사본이고, 3책 33장이다.

 

그러면 이 부아악에서 보니 ‘동쪽으로는 높은 산’을 의지하였다는 세 번째 숙제를 풀어볼까요?

 

아래에 제시된 지도에 보시면 동쪽 방향의 산이 보이시죠. 수락산이라고, 의정부의 진산입니다.

 

 의정부-동서남북A.png  image01.png

 

산의 높이도 만만치 않지만 산의 생김새가 비쥬얼 깡팹니다. 아마도 대한민국 어느 산과 비교해도 단연 일등. 담박에 눈에 띄는 멋진 모습을 갖추고 있죠.

 

어떤 모양이기에 그렇게 찬사가 대단하냐구요? 거대한 새가 의정부 분지 전체를 등에 업고 남쪽 하늘로 박차고 오르는 모습이라고 해야 할까요?

 

지금의 수락산은 2천 년 전 수리악이라는 지명으로 불렸을 것이라는 합리적인 의심이 가능한 산입니다. 부아악과 유사한 이름을 가졌던 것이죠. 

 

다음은 ‘남쪽으로는 비옥한 벌판’이 있었다는데 과연 그곳은 어디일까? 네 번째의 숙제를 풀어보도록 할까요? 

 

image02.png

 

삼각산과 수락산을 나누는 ‘중랑천=한강’을 중심으로 밑으로 특별히 높은 산이나 거친 산맥 없이 넓게 드리워진 평야가 보이시나요? 잘 안 보이신다고요?

 

그래서 준비했습니다. 마들역이라는 지명을. 마들이란? ‘말의 뜰’이라는 주장이 있지만 언어학의 지식을 동원해 접근해보면 ‘높고 넓은 들판’이라는 뜻입니다. 높다. 넓다는 뜻의 ‘마’와 들판을 뜻하는 ‘들’이 만나 한 단어를 이룬 글자이니까요.

 

이 지역이 얼마나 넓고 곡식이 잘되는 곳이었는지를 증명하는 사건으로 임진왜란을 들 수 있습니다.

 

임진왜란 발발 이듬해인 1593년(선조 26년) 3월 25일부터 27일까지 사흘 동안, 군량 확보를 위해 마들평야(노원평야)를 급습한 왜군과 큰 싸움이 치러졌죠.

 

그 증거를 확인하고 싶으시다면 그날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노원평전투대첩비가 세워져 있으니 언제든지 확인하시면 될 거 같습니다.

 

정리하다보니 신기하지 않나요? 서울 노원구에 평야(平野)라는 이름이 붙여졌었다는 사실이.

 

이제 다섯 번째 과제로 제시된 ‘서쪽으로는 큰 바다에 막혔으니’라는 내용에 대하여 풀어보는 시간을 가져보도록 할까요?

 

아래의 제시된 지도를 주목해주시기 바랍니다. 어떠세요? 서쪽의 바다가 북한산과 엄청 멀리 떨어져 있는 걸로 보이시나요?

 

의정부지명밟기운동본부 김수원(72세) 회원의 증언에 의하면 어린 시절 맑은 날 북한산에 오르면 인천까지 보였다는 말을 해주더군요.

 

이로 미루어 볼 때 북한산에서 서해 바다는 육안으로 확인이 가능한 위치인 겁니다. 그래서 결론을 내려 보면 가까운 거리에 접해 있다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는 겁니다. 


서해바다 입구.png

 

이렇게 정리하고 보니 하북위례성이 의정부라는 확신이 더욱 강하게 드시죠? 그게 바로 이 글 쓴 진정한 의도입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정리되는 거냐고 느닷없이 봉창 두드리실 분들이 계실 거 같아 다시 한 번 전체 내용 완전정복 들어갑니다.

 

우선 “북쪽으로는 한수(漢水)를 띠처럼 두르고 있다”는 논쟁거리가 정리되었습니다. ‘한수=한강’이 북쪽을 휘어 감고 있는 놀라운 광경을 담고 있는 지도를 제시했으니까요.

 

동쪽으로는 높은 산인 수락산을 의지하였다는 것을 증명했고, 남쪽으로는 비옥한 벌판인 마들평야가 드넓게 펼쳐져 있다는 것을 증명했으며, 서쪽으로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서해바다가 접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도로 증명하였습니다.

 

이로써 하북위례성은 빼박 의정부가 되었고 더 이상 논쟁의 소지는 전혀 남아 있지 않게 되었습니다. 왜냐? 다른 지역에서 더 이상의 자료를 제시할 수 있는 곳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마지막 남은 숙제가 있으니 안 풀고 넘어갈 수가 없겠죠? 하남 위례성의 위치에 대한 정리.

 

여러분들이 생각할 때 하남 같으세요? 직산 같으세요? 의정부가 하북위례성이라면, 그래서 소서노가 승하하고 한강의 이남으로 천도했다면 그곳이 하남일 확률이 높습니까? 저 멀리 직산일 확률이 높습니까?

 

즉 한강 이남으로 내려가서 십제(十濟)라는 나라이름을 쓴 곳의 위치는 자연스럽게 지금의 하남이 될 수밖에 없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다시 한 번 못 박습니다만 하남에서 십제라는 국호를 쓰고 안성지역으로 내려가면서 마한의 왕에게 천도를 허락받고 그때부터 백제라는 국호를 씁니다.

 

바로 이 상황이 되어서야 직산 중심의 역사가 열리는 것이니 의정부보다도 하남보다도 한참 뒤의 사건이라 정리하시는 게 맞고도 맞는 일이죠. 

 

【약력 소개】

교육학박사.

현) 세한대학교 사회복지상담학과 교수

현) 전국지명밟기운동본부 대표

현) 사단법인 한국청소년문화진흥협회 대표

저서: 『역사소년 신새날』, 『십대토론』, 『행복한 수다가 치매를 예방한다』


※ 본 기고문은 통통미디어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전체댓글 1

  • 32310
정일삼

노원은 갈대노에 들판원자를 쓰는 곳으로 갈대가 무성히 자라던 들판으로 수락산과 불암산을 경계로 중랑천을 따라 끝없이 평야가 펼쳐진 곳이었죠.7-80년대초까지만 해도 비닐하우스단지로 농사를 많이 지었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은 상계주공 대단위 아파트단지가 들어섰고. 노원이라는 지명에 걸맞게 중랑천변의 넓은 들판은 예전엔 말을 방목하던 곳이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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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명박사의 지명밟기] ㉛ 하북위례성 위치 논쟁 ·· 종지부 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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