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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어깨에 민들레 날개를 달고 [고홍곤의 야생화 에세이⑪]
#1 숱한 희망 품었던 민들레 꽃턱처럼, 세상은 나를 넉넉히 품어 주었네. 민들레는 봄의 전령이지만, 그 생명력은 가을의 끝자락인 10월에도 노란 꽃을 피워내고 홀씨를 맺는 경이로운 존재이다. 지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과 미물들에게 지상의 노란 일출인 민들레의 꽃말은 '행복'과 '감사'이다. 민들레 홀씨들이 모두 날아가고 남은 꽃턱을 찬찬히 보면, 그 작은 자리에 250개에서 300개에 이르는 홀씨가 머물다 날아간 흔적이 존재한다. 이는 실로 기적과 같은 경외감을 불러일으킨다. 이 수많은 희망의 홀씨를 바람에 실어 보내 잘 자라게 하는 우주의 오묘함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대단한 섭리이다. 바로 이 무한한 생명력과 넉넉함으로 씨앗을 품어주는 마음이 우리 삶의 근원이고, 우리가 영혼의 정화를 통해 받아들여야 할 긍정의 에너지이다. #2 봄날의 그리운 연서처럼 그렇게 꽃은 피어나고 우리는 몸의 피로를 물로 씻어내듯, 때로 영혼과 정신의 먼지를 씻어내기 위해 '영혼 정화'를 해야 한다. 이 영혼 정화는 자연의 긍정적인 에너지를 오감(五感)을 통해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에서 시작한다. 꽃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다. 꽃은 거실 풍수의 영순위 지침서이고, 꽃이 가진 맑고 좋은 기운이 공간의 에너지를 바꾸고 마음의 평안으로 이어지게 한다. 씨앗을 뿌려 꽃을 직접 가꾸며 사색하고, 피고 지는 순환 과정을 지켜보며 하늘의 섭리를 배우는 심신 정화 작용은 우주의 기운을 삶의 모든 순간으로 끌어당기는 행위이다. 실제 꽃의 세상과 우주의 기운은 상상을 뛰어넘어, 삶의 모든 순간에 배움을 선사한다. 햇빛이 꽃을 찬찬히 피워내듯, 우리 역시 '따뜻한 햇빛'이 되어 나 스스로를 비추고 서로의 삶을 비추며 성장시켜야 한다. 더 나아가 우리는 외부의 인정이 아닌 스스로의 근원에서 만족하는 꽃을 피워내야 한다. 이는 바로 '심연의 마음속 꽃'이다. #3 민들레 파라슈트 바람에 실려 벅차게 날아오를 희망이여 스스로 깊은 내면에서 아름답고 향기로운 꽃을 피워낼 때, 우리는 진정한 기쁨과 어떤 환경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자신을 찾게 된다. 이 내면의 꽃이 피어나면, 외부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를 정화하는 '정신적 자립'이 완성된다. 민들레 홀씨의 날개가 희망 파라슈트가 되어 영혼의 어깨에 날개를 달아주듯이, 우리는 그 가벼움과 자유를 느낄 수 있다. 영혼 정화는 단순한 기분 전환이 아니다. 자연의 긍정적인 무한 에너지로 스스로를 채우고, 그 빛을 타인에게 나누어 주는 삶을 실천하는 것이다. 잠시 눈을 감고 마음속에 민들레 홀씨의 날개를 달고 어디론가 날아가는 것을 상상하며, 우리는 자신에게 그리고 서로에게 따뜻한 햇빛을 비추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 본 기고문은 통통미디어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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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이재명 대통령에게 바란다’ ·· 두 가지 제언
이재명 대통령이 내세우는 ‘진짜 대한민국!’을 위해 시급하게 할 일은 남남갈등과 남북대립의 근원이 되는 좀비들의 심장부에 밝은 햇살을 비추는 것이라고 감히 제언한다. 이재명 대통령이 고귀한 생명까지도 위험에 처하면서 한민족의 올곧은 정신으로 모든 역경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민족과 나라에 대한 애국적 신념이 가슴속 깊이 자리 잡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반쪽인 나라에서 또 반으로 갈라진 지역 갈등을 해소하고 온 겨레의 화합과 번영을 위하는 일에 전력하기를 바란다. 먼저 나 자신을 소개하면, 충북 청주에 거주하는 독립유공자 유족이고 청주에서 배출된 단재 신채호 선생과 한민족 역사상 미증유의 공화주의 혁명가인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아버지 예관 신규식 선생의 친족이다. 또한 예관 선생 기념사업회 고문이며, 동북아 공화주의 혁명의 효시인 중국 손문 선생의 공화주의 혁명을 선도하던 신아동제사(新亞同济社)이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전신인 동제사(同济社)의 유족회 회장이다. 부끄러움을 아는 것이 사람이거늘! 동족 간에 서로 죽고 죽여야만 했던 6월 25일을 잊어서는 안 되는 교훈으로 삼아도 부족하거늘, 고작 전쟁기념관을 만들어 전쟁기념일을 기념이나 하고 있으니 배달민족 스스로에게 어찌 부끄럽지 않겠는가. 1905년 11월 17일과 1910년 8월 29일 국권을 팔아버린 친일파들이 저지른 죄업을 감추려고 해방 후 1950년 6·25 동란을 계기로 전쟁기념관을 만들었다. 이제는 반민족적 좀비로 자생하게 된 심장부이자 소굴이 된 전쟁기념관을 버젓이 자랑하면서 심지어는 결혼식까지 하고 있다. 좀비들이 은거지로 삼고 남남갈등과 남북 대립을 부추기는 전쟁기념관이라는 진원지를 없애는 것이 마땅하겠지만,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소란을 피하고 화합과 통합의 동력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두 가지를 제언하겠다. 첫째, ‘추모관’ 또는 ‘추도관’이라고 불러야 마땅하다. ■ 용산 소재의 전쟁기념관이 아니라, 동란 추모관 또는 추도관으로 개칭한다. ■ 각지의 6.25 관련한 호국원이 아니라 동란 추모(도)(공)원으로 개명한다. ■ 각지의 6.25 전쟁 기념탑이 아니라 동란 추모(도)탑으로의 변경한다. ■ 격전지에는 6.25 동란 불망비(不忘碑)를 세워야만 한다. 동족 간의 참화는 계승을 위한 기념관이 아니라, 반성과 참회를 통해 아픈 역사를 잊지 않는 추모관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옛부터 이어 온 왕권·왕정의 역사를 계승한 민권·민주를 위한 공화주의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민족의 얼과 혼의 정신이 올곧이 살아 있는 나라를 지키려면, 켜켜이 쌓여있는 왜곡되고 오염된 역사를 깨끗이 씻어 내는 일이 급선무다. 둘째, 독립유공자 및 유족의 국적회복에 관한 특별법 제정이다. 이는 거족을 위한 공립(拱立)의 토대가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죽어서 묻힐 나라가 있으니 됐다. 더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좋은 시절이 올 터이니 그때에 말하고 행하거라!” 노론의 심장인 화양서원과 지리적 경계를 마주하면서 약 250여 년 동안 대립해 오던 남인 좌장 가문이 구국의 길을 걸었다. 민권 민주 공화의 나라를 위하여 대를 이어 희생한 선대들께서 내게 내려 준 유지이자 나의 사명이다. 내가 죽기 전에 얼마나 어디까지 이루어 놓을지 모를 일이지만, 최소한 토대는 만들어 놓아 후대들이 배달민족의 번영을 이루기를 바랄 뿐이다. 이재명 대통령이 나라를 구하기 위한 내 제언을 숙고하여 나라를 반석에 올려 놓기를 바란다. 이로써 민족이 희망을 갖고 나라의 커다란 꿈을 성취해 동북아의 중심이자 세계의 문화를 선도하는 강국 대한민국을 만들어 대대로 명예가 빛나기를 간절히 바라는 바이다. ※ 본 기고문은 통통미디어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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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당신을 만나다] 고들빼기꽃
[고들빼기꽃] 천년의 소망 스며든 바윗돌이 노란꽃 편지를 전해준다 무어라 적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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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당신을 만나다] 메꽃
[메꽃] 거친 세상 당신이 있어 꿈꾸며 나아 갑니다 희망, 나를 깨우는 밀물 소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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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당신을 만나다] 장미
[장미] 세월의 무릎을 베고 잠시 하늘 보며 생각에 잠긴다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느냐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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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당신을 만나다] 사랑초
[사랑초] 아이의 맑은 눈망울 같은 ·· 희망으로 기쁨으로 당신께 피어나는 신의 미소 같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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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나팔꽃에게 지지대를 세우며 [고홍곤의 야생화 에세이⑰]
- #1 철 지난 10월, 뒤늦게 심은 나팔꽃 한 그루가 내 방 한쪽에 자리하고 있다. 창밖은 혹독한 겨울이고, 제철을 비껴난 탓에 쑥쑥 자라지는 못한다. 그저 실내로 스며드는 볕을 잠시 쬐어주는 게 전부지만, 오늘 나는 그 화분을 들여다보다가 여린 줄기가 허공을 더듬으며 위로 올라가려 안간힘을 쓰는 모습을 보았다. 그 간절한 몸짓이 대견하고도 안쓰러워, 나는 여린 줄기가 단단히 감고 올라갈 수 있도록 튼튼한 지지대 하나 더 세워주었다. 이 작은 지지대를 세우는 순간, 나는 비로소 깨닫는다. 나팔꽃은, 그리고 생명은 결코 홀로 완성될 수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겨울을 나는 이 작은 나팔꽃처럼, 모든 나팔꽃은 놀라운 잠재력을 품고 있다. 지지대가 없으면 바닥을 기어 다니며 제멋대로 엉켜버릴지라도, 실로 줄기를 잡아주거나 철망, 전봇대, 혹은 곁에 있는 나무 같은 ‘지지대’만 만난다면 나팔꽃은 5미터, 아니 그 이상도 거침없이 줄기를 뻗어 올린다. 지지대가 없으면 자신의 재능을 채 발휘하지 못한 채 덤불 속에 묻혀버리지만, 지지대를 만나는 순간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찬란한 꽃을 피워낸다. #2 우리네 삶도 이와 꼭 닮아 있다. 우리 각자가 가진 잠재력과 꿈은 나팔꽃의 줄기처럼 무한히 뻗어 나갈 힘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혼자의 힘만으로는 삶의 무게를 견디기 어렵고, 방향을 잃은 채 세상의 복잡함 속에 엉켜버리기 쉽다. 이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정서적 지지대’다. 누군가가 건네는 따뜻한 응원과 관심, 그리고 내면의 건강한 가치관이라는 지지대가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엉키지 않고 곧게 성장할 수 있다. 나팔꽃의 여린 줄기를 지지대에 묶어주며 돌이켜본다. 지금의 내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은 홀로 컸기 때문이 아니다. 내가 휘청거릴 때 나를 잡아준 누군가의 손길이 있었고, 내가 방향을 잃었을 때 나를 지탱해 준 삶의 스승이 있었다. 무엇보다 소방, 의료, 교육 등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묵묵히 우리를 지탱해 온 사회안전망이라는 수많은 지지대가 분명히 있었다. 그 고마움을 깊이 깨닫는 순간, 삶의 목표는 나 혼자만의 성장에서 ‘함께하는 성장’으로 확장된다. 나팔꽃이 지지대에 의지해 꽃을 피우듯, 나 또한 보이지 않는 사회적 역할들과 언제나 엄마처럼 안아주는 자연에게서 정서적 위안을 받으며 살아왔음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3 이제 나는 화분 속 나팔꽃에게 지지대를 세워주었던 그 마음으로, 세상 밖으로 시선을 돌린다. 받기만 하는 존재에 머물지 않고, 내가 누군가에게 빚진 그 사랑을 갚아가고 싶다. 저 여린 생명을 위해 기꺼이 막대 하나를 꽂아주었듯, 누군가에게 나의 어깨를 내어주고 나의 마음을 실처럼 내어주고 싶다. 우리가 서로에게 단단한 정신적 지지대가 되어줄 때, 우리는 각자의 재능을 엉킴 없이 발휘할 수 있다. 그렇게 너와 내가 서로를 지지하고 응원하며 각자의 가장 아름다운 꿈을 하늘 높이 피워내는 세상. 그것이 바로 이 겨울, 작은 나팔꽃 화분 앞에서 내가 배우는 삶의 지혜이자 우리가 함께 걸어가야 할 길이다. ※ 본 기고문은 통통미디어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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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나팔꽃에게 지지대를 세우며 [고홍곤의 야생화 에세이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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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바닥 위의 만다라 ·· 기쁨을 만지는 아침 [고홍곤의 야생화 에세이⑯]
- #1 먼지속에도 우주가 있듯 꽃씨에서 느끼는 우주의 숨결 한겨울의 아침 산책길은 시린 바람과 정적만이 가득한 길이다. 그러나 그 길 위에서 나는 생애 가장 뜨거운 기적을 매일 마주하며 가슴 뭉클한 감동을 느낀다. 예전에 널찍한 자동차 운전 연습장으로 쓰이던 드넓은 언덕, 그 나팔꽃 군락지에 아침마다 곱게 피어나던 꽃들은 이제 사라졌으나, 그 자리엔 야무지게 여문 씨앗들이 보석처럼 박혀 있다. 나는 아침마다 시간이 되면 기쁜 마음으로 그곳을 산책하며, 동심으로 돌아가 씨앗들을 채집한다. 그것은 단순한 식물의 종자를 줍는 행위가 아니다. 무언가에 바삐 쫓기며 살아가는 내가 잠시 멈춰 서서, 비로소 ‘기쁨과 우주 생명의 근원인 설계도의 정체’를 대면하고 수확하는 성스러운 의식이다. 사람들은 기쁨이 눈에 보이지 않는 관념이라 말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오늘 나는 꿈틀거리는 기쁨을 손바닥 위에 올려두고 직접 만져보았다. 씨앗의 그 단단하고 매끄러운 촉감은 환상이 아닌 실재였다. #2 겨울바람에 야윈 줄기, 먼지 앉은 씨방마다 보이지 않는 맥박이 고동치며 다시 피어날 새봄날의 약속이여 그 작은 씨앗 속에는 지난여름을 뜨겁게 달구었던 햇살과 나무를 흔들던 바람 소리, 그리고 매일 아침 찬란하게 피어나 다른 생명들에게 활력을 불어넣어 주던 나팔 소리의 환희가 응축되어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모진 풍파를 견뎌낸 수천 년, 수만 년 세월의 결이 그 안에 깃들어 있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다시 환하게 피어날 생명의 꿈틀거리는 숨결이 들려온다. 이 씨앗은 우주의 에너지가 한 점으로 집약된 '기쁨의 결정체'이자, 꽃받침과 꽃잎을 다 버리고 만다라(曼陀羅)를 통해 생애를 완벽하게 갈무리한 '위대한 마침표'였다. 더욱 경이로운 사실은, 이 씨앗을 채취해 추위가 조금 누그러진 2월 전후 양지바른 베란다에 심는 행위가 결코 미래의 행복을 막연히 기다리는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아직 오지 않은 봄날, 지상에서 가장 아름답게 피어날 환희를 지금 이 순간 내 곁으로 미리 가져오는 마법인 것이다. 우리는 흔히 꽃이 피어야만 기쁨이 온다고 믿으며 현재를 저당 잡히곤 한다. 하지만 씨앗을 손에 쥐는 순간, 미래의 찬란한 나팔꽃은 이미 나의 현실이 된다. 기쁨은 도달해야 할 목적지가 아니라, 씨앗을 쥐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의 확신으로부터 시작되는 법이다. #3 한 알의 마침표가 터져 나와 써 내려간 찬란한 대서사시 나팔꽃의 함성이여 어느새 나의 가슴 속에는 수만 송이의 나팔꽃이 활짝 피어 있다. 손바닥 위에서 달그락거리는 씨앗들의 소리는 내 영혼을 기쁨과 설렘으로 채우는 우주의 합창이다. 나는 나팔꽃씨를 통해 우주의 기운과 연결되어 거대한 에너지를 느끼며, 순환하는 영원 속에서 아버지의 새근거리는 숨결마저 듣는다. 이 작고 검은 마침표는 내게 가르쳐준다. 진정한 기쁨이란 눈에 보이는 화려함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내일의 희망을 오늘 내 손바닥 위에 실체로 올려두는 지혜에 있다는 것을 말이다. 각박한 현실 속에서 진정한 기쁨을 직접 느끼고 만져보고 싶은 이들이 있다면, 지금 자신의 손바닥 위를 가만히 내려다보라. 보이지 않는 미래에 떨기보다, 작더라도 단단한 ‘기쁨의 씨앗’ 하나를 들판에서 먼저 채집해 보자. 그리고 창가에 심어 매일 물을 주고 대화하며 교감해 보자. 그 정성 어린 손길을 통해 기쁨을 미리 가져와 내면에 심을 줄 아는 사람에게, 겨울은 고난의 계절이 아니라 가장 뜨겁게 축제를 준비하는 계절이다. 우리 마음속에 이미 피어난 나팔꽃 한 송이가, 이 시린 세상을 향해 가장 따뜻한 인사를 건네고 있지 않는가. ※ 본 기고문은 통통미디어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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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바닥 위의 만다라 ·· 기쁨을 만지는 아침 [고홍곤의 야생화 에세이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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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한의 꽃, 영원한 나의 유도등 [고홍곤의 야생화 에세이⑮]
- 백두 산정에 외롭게 피어나는 꽃들,,, 하늘이 내려와 한참을 놀다가 간다 산 정상 가뭄에도 이슬로 피어나는 별꽃 삶의 어두운 길에서 점멸하는 마음속 반딧불이처럼.. 매서운 추위가 시작되는 1월, 옷깃을 여밀수록 나는 가장 뜨거웠던 생명의 기억을 떠올린다. 영하의 기온이 창문을 때리고 세상이 잿빛으로 웅크리는 이 계절이야말로, 오히려 뜨거운 생명력이 만들어낸 기적을 돌아보게 한다. 그것은 8년 전 백두산 정상의 칼바람 속에 피어난 두메양귀비, 5년 전 설악산 대청봉 바위 틈 가뭄 속에서 핀 참바위취, 그리고 4년 전 지리산 천왕봉과 한라산 윗세오름의 땡볕과 비바람을 견뎌낸 구절초와 설앵초의 강인하고도 눈부신 자태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험준한 산 정상, 그 가장 가혹한 환경에서 피어났던 꽃들을 하나하나 되뇌어 본다. 그들은 단순히 아름다운 풍경이 아니었다. 숨 막힐 듯한 고독과 고통의 순간에도 결코 포기하지 않고 피어나는 법을 알려준, 내 삶의 고난과 역경의 길목마다 나를 비춰주던 '삶의 유도등'과도 같은 존재들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카메라 셔터를 눌러 작품으로 남긴 그 꽃들은 이제 그 자리에 없다. 계절이 지나 꽃잎은 떨어지고 흙으로 돌아가 물리적인 실체는 사라졌다. 마주한 능선 앞에 물러섬 없이 세상 바람에 흔들림 없이.. 그리고 이 사라짐의 역설은 나의 가장 깊은 그리움, 지난 3월 돌아가신 아버지의 부재와 맞닿아 있다. 이제 나는 아버지를 뵐 수도, 그 따뜻한 손을 잡을 수도 없다. 산 정상의 꽃이 시들어 물러났듯, 아버지께서도 육신의 한계를 넘어 먼 여행을 떠나셨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 물리적 부재가 곧 소멸을 뜻하지는 않는다. 사진 속 꽃들이 여전히 나에게 강인한 생명력으로 큰 힘을 주듯, 뵐 수 없는 아버지 역시 내 삶의 가장 견고한 정신적 지주로서 존재만으로도 큰 힘을 주고 계신다. 나는 이 신비로운 경험을 통해 확신한다. 눈에 보이는 꽃은 지고 아버지는 떠나셨지만, 우리 사이의 본질적인 연결은 영원히 끊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 연결은 혈연을 넘어선 영혼의 대화와도 같다. 꽃들이 극한을 이겨낸 강인한 생명력으로 작품 속에서 영원성을 얻었듯, 아버지 또한 당신의 평생에 걸친 헌신과 숭고한 사랑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으셨다. 이것은 시공간과 물리적 거리를 초월한 초자연적인 연결이다. 아버지가 남겨주신 존재의 모습은 어두운 삶의 길을 밝히는 꽃등처럼, 지금 이 순간에도 나에게 나침반이 되어주고 있다. 꽃은 졌지만 그 향기는 내 마음에 문신처럼 새겨져, 영원히 접속되어 있는 것이다. 결국 나는 사라진 꽃과 뵐 수 없는 아버지의 사랑이라는 보이지 않는 힘 덕분에, 마음에 꽃을 가득 품은 진정한 부자로 살아가고 있다. 이 단절되지 않은 연결이 주는 에너지가 있기에, 나는 춥고 힘든 세상 속에서도 희망을 이야기하며 다시 일어설 힘을 얻는다. 혼자인 듯한 날들, 주저앉고 싶었던 날들 하늘은 꽃을 내밀며 함께해 주었지 이제 나는 이 충만한 에너지를 나 혼자만 누리지 않을 것이다. 추운 겨울날 건네는 따뜻한 오뎅 국물 한 컵처럼, 삶의 유도등이 되어준 꽃들과 아버지의 마음을 담아 누군가에게 온기를 나누는 삶을 살 것이다. 나를 비춘 그 영원한 불빛처럼, 타인의 어둠을 밝혀주는 존재가 되고 싶다. 비록 눈에는 보이지 않아도, 언제나 '접속'되어 나를 응원해 주는 영원한 그 힘을 믿으며, 나 또한 누군가의 유도등이 되어 흔들림 없이 나아갈 것이다. ※ 본 기고문은 통통미디어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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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한의 꽃, 영원한 나의 유도등 [고홍곤의 야생화 에세이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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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노루귀, 뿌리의 틈을 내어주다 [고홍곤의 야생화 에세이⑭]
- #1 나무는 하늘과 세상의 소식을 전해주고, 노루귀는 나무의 친구가 되어주는ᆢ 비우고 버리며 어느새 여기까지 왔는가... 시간이 갈수록 깊어지는 삶의 나이테여... 이 사색이 깊어지는 매서운 추위가 시작된 한 겨울에 4년 전 노루귀와의 만남을 떠올린다. 아직 겨울의 한기가 가시지 않은 3월 중순, 야생화 촬영을 위해 찾았던 경기도 천마산 7부 능선이었다. 그곳에서 아주 큰 나무의 굵은 뿌리 틈 사이에 피어난 작은 청노루귀를 우연히 마주쳤다. 그 연약한 모습이 얼마나 예쁘고 앙증맞던지 나는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고, 절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노루귀의 꽃말은 인내, 믿음, 희망이다. 깊은 산 7부 능선에 피어난 그 1센티미터 크기의 청노루귀는 다른 색상의 노루귀도 있지만, 잎보다 꽃이 먼저 피어나며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스스로 봄을 맞이하는 강인한 생명력 그 자체였다. #2 겨울 땅의 심장을 녹이고 마침내 피어난 아기 꽃들의 봄날의 합창이여. 2년 후, 다시 야생화 촬영을 하며 그날의 경이로움을 잊지 못하고 그리던 마음으로 그 자리를 찾았다. 혹여 토끼나 다른 짐승의 시련에 사라지지 않았을까 내심 걱정했었다. 놀랍게도 그 청노루귀는 여전히 그곳에서 키가 조금 더 커진 모습으로 당당히 뿌리내리고 있었으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술을 뽐내며 모진 겨울을 이겨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각박한 도시의 삶 속에서 생존한 '나'와 시련을 견뎌낸 '노루귀'가 재회할 수 있었음에 하늘에 감사했고, 다시 한번 가슴 뭉클한 감동이 밀려왔다. 그러나 이 노루귀가 홀로 자란 것은 아니다. 그 곁의 거대한 나무는 자신의 굵은 뿌리를 기꺼이 틈내어, 작은 생명이 햇살을 볼 수 있도록 넉넉하게 자리를 내어주었다. 큰 나무는 노루귀에게 하늘과 세상의 소식을 전해주고, 노루귀는 나무 곁에서 조용한 친구가 되어주며 삶의 이야기를 나누는 듯하다. 뿌리와 흙, 나무와 꽃이 서로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조화롭게 공존하는 이 자연의 현상은 참으로 경이로운 진리이다. 결국 청노루귀는 혹한의 시련을 이겨낸 인내의 상징이며, 큰 나무와의 관계는 아름다운 공존의 모범이다. #3 따뜻한 당신이 있어 봄날의 기적을 맞이 합니다 나는 노루귀와 거목의 관계를 통해 우리 삶의 근원을 깨닫는다. 이 작은 노루귀가 '나'의 모습처럼 큰 나무라는 '절대자'의 품 안에서 섭리를 따르듯, 우리 역시 보이는 부모님과 주위의 깊은 사랑, 그리고 보이지 않는 거대한 자연의 품 속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온전히 느낀다. 우리 인간 사회도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하고, 넉넉히 자리를 내어주며, 더불어 살아가는 공존의 삶을 실천해야 하는 것이다. 하늘을 나는 새들과 물속의 물고기들은 무엇을 생각하는가? 한 해를 시작하면서 우리는 이 근원의 질문을 마주한다. 다시 추운 겨울을 이겨내고 피어날 노루귀를 기다리며, 다가오는 봄을 재회할 희망을 품고 인내와 믿음으로 감사하며 살아갈 것을 다짐한다. ※ 본 기고문은 통통미디어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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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노루귀, 뿌리의 틈을 내어주다 [고홍곤의 야생화 에세이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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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손초, 생명의 번식과 나눔의 서정시 [고홍곤의 야생화 에세이⑬]
- 땅에 닿는 순간 또 하나의 푸른 우주가 되리니·· 만손초는 그 이름처럼 '수많은 자손'을 상징하는 경이로운 생명체이다. 잎 가장자리에 맺히는 수많은 작은 싹들은 이 식물이 가진 강렬한 생명력과 무한한 번식력을 웅변한다. 꽃말은 '자손 번성', '사업 번창', '설레임'이다. 25년 동안 꽃을 가꿔온 나에게 만손초는 곧 생명 그 자체였다. 그러나 한때 그 왕성함은 나에게 오히려 부담이었다. '비움의 미학'과 '정리의 상쾌함'을 추구하며 쓰레기통을 자주 비우고 내 주위의 물건을 최대한 줄여가는 나의 루틴은 단순한 행위를 넘어, 마음속 잡념과 미결 과제까지 빨아들이는 '마음의 진공 청소기'와 같았다. 나의 일상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만손초의 번식은 통제 불능의 영역이었다. 개체 수가 불어날 때마다 어쩔 수 없이 일부를 버려야 했고, 그 순간 생명을 폐기하는 듯한 죄책감은 나의 마음 한구석을 무겁게 짓눌렀다. 죄책감과 정리 정돈 사이에서 고뇌하던 나에게, 만손초는 스스로 해답을 제시했다. 버림으로써 생기는 죄책감을 나눔이라는 새로운 가치로 대체하는 것이다. 나는 만손초를 더 이상 '정리해야 할 물건'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전해야 할 생명력'으로 보기 시작했다. 이 깨달음은 10년 전, 인생의 가장 힘들었던 시기를 겪던 나에게 만손초가 건넸던 위로와 맞닿아 있다. 무너질 것만 같던 그때, 사무실 한켠에서 만손초의 잎사귀마다 돋아나는 작은 새끼들은 '포기하지 말라'고 말해주는 듯했다. 나는 그 강인한 생명력으로 버텨낼 수 있었고, 만손초의 클론을 나누는 행위가 이제 그 받은 힘을 세상에 되돌려주는 의식이다. 잘 키워낸 만손초를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하나씩 나누어 줄 때, 내 마음은 소유의 짐에서 벗어나 물리적 가벼움을 얻는다 만손초, 나눔의 기쁨! 씨앗 뿌려 만난 작은 기적도 강인한 생명력을 통해 힘든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스스로 긍정의 마음을 가지게 하는 일이 일상에서 실천되는 과정이다. 만손초의 나눔은 놀라운 기쁨으로 이어졌다. 파킨슨병을 앓으면서도 꽃그림을 누구보다 잘 그리시는 원주에 계신 작가님께 만손초 클론을 보냈을 때의 일이다. 얼마 뒤, 작가님으로부터 SNS를 통해 작고 여렸던 클론이 훌쩍 자란 사진이 도착했다. 만손초의 생명력이 나에게서 시작되어, 이제는 또 다른 누군가의 삶에 희망의 싹을 틔우고 있다는 사실에 감격한다. 이처럼 우리가 식물에게 의미를 부여하고 정성을 쏟을 때, 그 식물은 우리에게 새로운 희망과 힘을 주며 생명력의 기운을 퍼뜨리는 것이다. 또 어느 회사 대표님은 사무실에 만손초를 잘 번식시켜 곳곳에서 볼 수 있게 하셨는데, 만손초를 대하는 삶의 태도 자체가 성공적인 사업 수완의 근원이었다. 만손초를 통한 나눔의 미학 외에도, 나에게 기쁨을 주는 또 다른 도전이 있다. 바로 가을 들판에서 나팔꽃 씨를 받아 한 계절 앞서 씨를 뿌리는 작업이다. 씨앗을 뿌리는 행위는 미래의 기쁨을 현재로 당겨오는 작업이다. 아직 꽃은 피지 않지만, '피울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와 희망을 심음으로써 현재 기분을 즉각적으로 좋게 한다. 추위를 이겨내고 베란다에서 3-4월에 작은 키로 피어난 나팔꽃의 기적은 나에게 노력의 결과이자, 우주의 기운과 초연결된 생명력의 강렬한 증명이었다. 만손초의 나눔과 나팔꽃의 개화가 내 삶에 활력을 주듯, 나는 정리된 마음과 환경을 바탕으로 만손초를 정성껏 가꿔 5년 후 만손초 꽃을 피워낼 꿈을 꾼다. 만손초의 끈질긴 생명력과 매일 아침 피어나며 삶을 노래하는 나팔꽃의 모습은 나의 일상이 곧 생명력에 대한 경외와 감사이며, 이 모든 기쁨은 꽃을 통해 우주와 초연결되는 삶의 깊은 서정이다. ※ 본 기고문은 통통미디어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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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손초, 생명의 번식과 나눔의 서정시 [고홍곤의 야생화 에세이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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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춤도 결국 꽃을 피우는 순간 [고홍곤의 야생화 에세이⑫]
- #1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 그 모든 순간순간을 사랑해야 함을... 찬 가을바람이 불자 나무는 묵묵히 잎을 내려놓는다. 자연의 거대한 순환처럼 보이는 이 낙엽의 쇠퇴 속에서, 역설적으로 깊은 위로와 격려를 얻는다. 모든 시듦은 다음 봄을 위한 준비이며, 잠시 멈춤은 다시 시작을 위한 숨 고르기임을 알기 때문이다. 이 순환 속에서 회복 탄력성의 거대한 은유를 발견한다. 특히 12월 겨울에 붉은 꽃을 피우는 개발 선인장의 생태는 그 자체로 끈기와 희망의 메시지이다. 이 식물의 꽃말은 ‘끈기와 희망’이며, 고온 건조한 사막에서 살아남는 강인함을 지니고 있다. 개발 선인장은 추위와 건조함을 견뎌낸 후에야 비로소 화려한 꽃을 피운다. 이는 잠시 멈춘 듯 보이는 시간 속에서 내부의 힘을 축적하고, 마침내 아름다운 결실을 맺는 삶의 진리를 명확히 보여준다. 이처럼 멈춤이 곧 꽃봉오리임을 알지만, 6주 만에 오늘 산행은 여전히 버겁다. 새끼발가락 부상 후, 평소 가볍던 산길이 두 배의 힘듦으로 다가온다. 과거 지리산 천왕봉에서 발목을 다쳐 두 달을 고생했던 기억까지 겹쳐, 이 회복의 더딤이 때로는 고통스럽기까지 하다. 하지만 바로 그 '다시 오를 수 있음'에 대한 감사함이 오늘 이 힘든 발걸음을 이끄는 가장 큰 원동력이 되어준다. #2 시련은 축복이며 담금질이었음을... 나는 의도적으로 '시든 꽃'을 들여다본다. 지난주엔 시들어가는 칼랑코에를 전달받았고, 힘겹게 버티고 있던 야생초 용담꽃은 더 큰 화분으로 옮겨주었다. 여름을 인고하며 버틴 개발 선인장은 이제 다시 생기를 얻어 크리스마스쯤 빨간 꽃을 피울 준비를 한다. 이 시든 생명들을 가꾸고 보살피는 행위는 상처 입고 더딘 회복을 거치는 나 자신의 삶을 대하는 태도와 다르지 않다. 잠시 쇠퇴하거나 멈춘 듯 보여도, 정성을 쏟아 반드시 제대로 피워 보겠다는 의지, 이것이 바로 우리 안에 내재된 회복 탄력성의 발현이며, 고난 속에서도 희망을 놓지 않는 삶의 가장 아름다운 은유이다. 과거 목표를 잃고 방황하던 시절, 한강에서 자전거를 타다 체인이 벗겨져 홀로 멈춰 서서 한참을 헤맨 적이 있다. 남들은 열심히 달려 나갈 때, 나는 멈춤과 뒤처짐의 시간을 견뎌야 했다. 그때는 그 모든 순간이 방황의 시간과 겹쳐지면서 오직 좌절로만 느껴지곤 했다. 그러나 지금 낙엽이 지는 이 가을 앞에서 명확히 깨닫는다. 그 '뒤처짐', '멈춤', '후퇴'의 시간들은 결코 헛되거나 의미 없는 시간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들은 삶의 속도를 늦추어 내면을 돌아보게 하고, 잠재력을 응축시키는 귀한 신호였다. 세상의 이치가 얻는 것이 있으면 잃고, 잃는 것이 있으면 다시 얻는 순환이듯, 아픔과 뒤처짐 속에서 반드시 무언가를 배우고 얻는다는 교훈이다. 결국 삶의 모든 순간은 고마움을 느낄 이유가 된다. 이 추운 계절을 잘 이겨내고 봄을 준비하는 씨앗들처럼, 우리의 고난 역시 희망의 꽃을 피우기 위한 씨앗이다. 어떤 순간도 버릴 것이 없다. 힘든 회복의 시간도, 잠시 멈춰 섰던 과거도, 시들어가는 꽃봉오리를 가꾸는 현재의 노력도... 뒤처짐 속에서 얻었던 깨달음처럼, 상처 입었던 모든 발걸음이 오늘 이 산길을 오르는 힘이 된다. 나는 지금 내 삶의 가장 낮은 지점에서 오히려 가장 단단한 꽃봉오리를 만들어가고 있다. 우리는 늘 피어날 준비를 하고 있다. 고난의 겨울을 지나, 다시 활짝 피어날 미래를 기대하며 오늘 나의 느린 발걸음까지 사랑해야 한다. ※ 본 기고문은 통통미디어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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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춤도 결국 꽃을 피우는 순간 [고홍곤의 야생화 에세이⑫]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