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나팔꽃에게 지지대를 세우며 [고홍곤의 야생화 에세이⑰]
#나팔꽃 ·· 고홍곤 야생화 사진작가

#1
철 지난 10월, 뒤늦게 심은 나팔꽃 한 그루가 내 방 한쪽에 자리하고 있다. 창밖은 혹독한 겨울이고, 제철을 비껴난 탓에 쑥쑥 자라지는 못한다.
그저 실내로 스며드는 볕을 잠시 쬐어주는 게 전부지만, 오늘 나는 그 화분을 들여다보다가 여린 줄기가 허공을 더듬으며 위로 올라가려 안간힘을 쓰는 모습을 보았다.
그 간절한 몸짓이 대견하고도 안쓰러워, 나는 여린 줄기가 단단히 감고 올라갈 수 있도록 튼튼한 지지대 하나 더 세워주었다.
이 작은 지지대를 세우는 순간, 나는 비로소 깨닫는다. 나팔꽃은, 그리고 생명은 결코 홀로 완성될 수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겨울을 나는 이 작은 나팔꽃처럼, 모든 나팔꽃은 놀라운 잠재력을 품고 있다.
지지대가 없으면 바닥을 기어 다니며 제멋대로 엉켜버릴지라도, 실로 줄기를 잡아주거나 철망, 전봇대, 혹은 곁에 있는 나무 같은 ‘지지대’만 만난다면 나팔꽃은 5미터, 아니 그 이상도 거침없이 줄기를 뻗어 올린다.
지지대가 없으면 자신의 재능을 채 발휘하지 못한 채 덤불 속에 묻혀버리지만, 지지대를 만나는 순간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찬란한 꽃을 피워낸다.

#2
우리네 삶도 이와 꼭 닮아 있다. 우리 각자가 가진 잠재력과 꿈은 나팔꽃의 줄기처럼 무한히 뻗어 나갈 힘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혼자의 힘만으로는 삶의 무게를 견디기 어렵고, 방향을 잃은 채 세상의 복잡함 속에 엉켜버리기 쉽다.
이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정서적 지지대’다.
누군가가 건네는 따뜻한 응원과 관심, 그리고 내면의 건강한 가치관이라는 지지대가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엉키지 않고 곧게 성장할 수 있다.
나팔꽃의 여린 줄기를 지지대에 묶어주며 돌이켜본다. 지금의 내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은 홀로 컸기 때문이 아니다.
내가 휘청거릴 때 나를 잡아준 누군가의 손길이 있었고, 내가 방향을 잃었을 때 나를 지탱해 준 삶의 스승이 있었다.
무엇보다 소방, 의료, 교육 등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묵묵히 우리를 지탱해 온 사회안전망이라는 수많은 지지대가 분명히 있었다.
그 고마움을 깊이 깨닫는 순간, 삶의 목표는 나 혼자만의 성장에서 ‘함께하는 성장’으로 확장된다.
나팔꽃이 지지대에 의지해 꽃을 피우듯, 나 또한 보이지 않는 사회적 역할들과 언제나 엄마처럼 안아주는 자연에게서 정서적 위안을 받으며 살아왔음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3
이제 나는 화분 속 나팔꽃에게 지지대를 세워주었던 그 마음으로, 세상 밖으로 시선을 돌린다.
받기만 하는 존재에 머물지 않고, 내가 누군가에게 빚진 그 사랑을 갚아가고 싶다.
저 여린 생명을 위해 기꺼이 막대 하나를 꽂아주었듯, 누군가에게 나의 어깨를 내어주고 나의 마음을 실처럼 내어주고 싶다.
우리가 서로에게 단단한 정신적 지지대가 되어줄 때, 우리는 각자의 재능을 엉킴 없이 발휘할 수 있다.
그렇게 너와 내가 서로를 지지하고 응원하며 각자의 가장 아름다운 꿈을 하늘 높이 피워내는 세상.
그것이 바로 이 겨울, 작은 나팔꽃 화분 앞에서 내가 배우는 삶의 지혜이자 우리가 함께 걸어가야 할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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