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6(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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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류와 온조 두 형제는 어디까지 함께 했을까요? 

 

인천에서 백제사를 연구하시는 분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인천 미추홀에서 헤어졌다고들 하는데 과연 그럴까요?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이 논쟁의 진위를 한 방에 가릴 수 있는 기록이 있어 소개합니다. 

 

[及朱蒙在北扶餘所生子來爲太子, 沸流⋅溫祚恐爲太子所不容, 遂與烏干⋅馬黎等十臣南行, 百姓從之者多. 遂至漢山, 登負兒嶽, 望可居之地. 沸流欲居於海濱, 十臣諫曰. 惟此河南之地, 北帶漢水, 東據高岳, 南望沃澤, 西阻大海, 其天險地利, 難得之勢. 作都於斯, 不亦宜乎. 沸流不聽, 分其民, 歸彌鄒忽以居之. 溫祚都河南慰禮城, 以十臣爲輔翼, 國號十濟. 是前漢成帝鴻嘉三年也. 沸流以彌鄒土濕水鹹, 不得安居, 歸見慰禮, 都邑鼎定, 人民安泰, 遂慙悔而死. 其臣民皆歸於慰禮. 後以來時百姓樂從, 改號百濟. 其世系與高句麗, 同出扶餘, 故以扶餘爲氏.]

 

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때 낳은 아들이 와서 태자가 되자, 비류와 온조는 태자에게 용납되지 못할까 두려워 마침내 오간(烏干)⋅마려(馬黎) 등 열 명의 신하와 더불어 남쪽으로 갔는데 따르는 백성들이 많았다.

드디어 한산(漢山)에 이르러 부아악(負兒嶽)에 올라가 살 만한 곳을 바라보았다. 비류가 바닷가에 살고자 하니 열 명의 신하가 간하였다.

“이 강의 남쪽 땅은 북쪽으로는 한수(漢水)를 띠처럼 두르고 있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을 의지하였으며, 남쪽으로는 비옥한 벌판을 바라보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에 막혔으니 이와 같은 지세의 험준함과 이점은 얻기 어렵습니다. 여기에 도읍을 세우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비류는 듣지 않고 그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彌鄒忽)로 돌아가 살았다.

온조는 한수 남쪽[河南]의 위례성(慰禮城)에 도읍을 정하고 열 명의 신하를 보좌로 삼아 국호를 십제(十濟)라 하였다. 이때가 전한(前漢) 성제(成帝) 홍가(鴻嘉) 3년(기원전 18)이었다.

비류는 미추홀의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편안히 살 수 없어 위례성으로 돌아와 보니 도읍은 안정되고 백성들도 평안하므로 마침내 부끄러워하고 후회하다 죽으니, 그의 신하와 백성들은 모두 온조에게 귀부하였다.

그 뒤에 올 때 백성들이 즐겨 따랐다고 하여 국호를 백제(百濟)로 고쳤다. 그 계통은 고구려와 더불어 부여(扶餘)에서 같이 나왔기 때문에 부여(扶餘)를 씨(氏)로 삼았다.

『삼국사기』 백제 본기 온조 왕조

 

이 내용을 정리해보면 한산(漢山) 즉 북한산에 이르러 부아악(負兒嶽)에 올라가 즉 만장봉에 올라가 살만한 땅을 찾고 있었는데, 비류가 미추홀에 미련이 남아 그곳으로 돌아갔다가 됩니다.

 

아! 북한산 부아악(負兒嶽)은 의정부 회룡분지 하북위례성(河北慰禮城)의 바로 뒤편인 거는 아시죠? 이 부분은 미리 알려드리고 시작해야 할 거 같은 느낌적 느낌.

 

그러니까 북한산 부아악(負兒嶽) 정도까지는 소서노, 온조, 비류가 함께 했던 거라는 걸 알 수 있는 거죠. 좀 더 유추해보면 의정부 회룡분지 하북위례성(河北慰禮城)까지는 함께 했습니다. 그리고 하북위례성(河北慰禮城)에서 이별하게 되죠.

 

이런 유추가 가능한 이유는 의정부에 남아 있는 ‘비류·온조 이별 설화’ 때문입니다. 왜 다른 지역에는 없는 이별의 설화가 의정부에는 남아 있는 것일까?

 

그건 당연히 의정부 지역에서만 일어난 일이어서 독보적으로 전승되었기 때문이겠죠. 다음은 비류·온조 두 형제의 이별과 관련한 채록 내용입니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우리 쌍둥이 고모들은 낮이고 밤이고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을 좋아했지. 그때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은 내용은 ‘비류·온조 두 형제의 이별’에 관한 이야기였어. 눈보라가 거세게 치는 날 그 두 사람은 헤어지는데 눈물바다를 이루었다는 말을 수도 없이 들었지.

김수원(72세, 의정부 토박이, 의정부지명밟기 진등친목회 회원)

       

싸웠네! 싸웠어. 위의 내용을 보니까 싸웠어요. 비류·온조 두 형제가 이별한 이유는 이견이 있었던 거 같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눈보라가 거세게 치는 날 이별한다는 게 통상적으로 이해됩니까? 두 형제가 우애로운 결론을 내고 계획적으로 움직였다면 눈보라치는 날 헤어지겠냐 이 말입니다.

 

그리고 이건 이별이 아니고 결별이라고 봐야하지 않을까 하네요. 비류는 왜 눈보라 치는 날임에도 불구하고 미추홀, 즉 인천으로 돌아갈 것을 고집했던 걸까요?

 

반대로 온조는 왜 그렇게 형이 그런 식으로 떠나는 데도 회룡분지 하북위례성(河北慰禮城)에 집착해야 했던 걸까요?

 

거기에는 각각의 비밀이 있습니다. 비류는 미추홀 소래포구에서 나는 소금과 지금의 인천 주안(朱安) 지역에서 나는 철을 차지하기 위해서였고, 온조는 온조국(溫祚國)의 비옥한 토지, 동쪽에 자리한 모수국(牟水國)의 청옥(靑玉) 그리고 회룡분지 하북위례성(河北慰禮城)에 하늘 높이 서 있는 ‘신(神)의 병기(兵器)’를 차지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신(神)의 병기(兵器)’라? 그것의 비밀은 바로 석경(石鏡)바위입니다. 엥? 석경바위가 뭔데?

 

석경(石鏡)바위의 다른 이름은 자영경(自映鏡). 최근에는 업경대(業鏡臺: 불교에서 지옥에 있는 염라대왕이 중생의 죄를 비추어 보는 거울)라고 불리는 거울바위입니다.

 

혹시 자명고(自鳴鼓)라고 들어 보셨나 모르겠네요? 낙랑국(樂浪國)에 있었다고 하는 적의 침범을 북소리로 알려주는 전설적인 북.

 

낙랑국에 자명고(自鳴鼓)가 있다면 온조국(溫祚國)엔 자영경(自映鏡)이 있었습니다. 자영경(自映鏡)은 적의 침범을 미리 비쳐주고, 빛을 반사 시켜 침범하는 적을 교란시키며 죄(罪)의 진위(眞僞)를 가려주는 신비(神祕)의 거울(鏡)이죠. 자영경(自映鏡)은 석경(石鏡)바위의 다른 이름이기도 합니다.

 

온조대왕은 이 석경바위, 자영경(自映鏡)에 많은 집착을 가지고 있었죠.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온조대왕은 북쪽에 자리하고 있는 낙랑국과 말갈족 때문에 머리가 꽤나 아팠던 듯합니다. 

 

매년 번갈아가며 쳐들어오는 낙랑국과 말갈족의 침범은 온조국 백성들의 안위를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사건이었을 것이고 그에 대한 대비책을 직접 꼼꼼히 챙길 정도로 온조대왕에게는 스트레스였을 겁니다.

 

그런 상황에서 석경바위 자영경(自映鏡)은 적과의 싸움을 승리로 이끌어 줄 수 있는 ‘신(神)의 병기(兵器)’가 될 테니 온조대왕 입장에서는 죽어도 포기하지 못할 신(神)의 선물인겁니다.

 

온조왕(溫祚王) 2년(B.C 17년) 봄 정월 왕은 여러 신하에게 이르기를 “말갈이 우리 북쪽 경계와 연접하여 그 사람들이 날래고 간사하니 마땅히 무기를 수선하고 군량을 저축하여 막고 지킬 계책을 마련하라”고 하였다. 

3월 왕은 족부(族父) 을음(乙音)이 지식과 담력이 있다 하여 우보(右補)의 직을 제수하고 병마를 위촉하였다.

二年 春正月 王謂群臣曰 “靺鞨連我北境 其人勇而多詐 宜繕兵積穀 爲拒守之計” 三月 王以族父乙音 有智識膽力 拜爲右輔 委以兵馬之事.

 

온조왕(溫祚王) 3년(B.C 16년) 가을 9월 말갈이 북쪽 경계를 침범하므로 왕이 강한 군사를 거느리고 급히 공격하니 적은 크게 패하여 살아서 돌아간 자가 열에 하나, 둘이었다.

三年 秋 九月 靺鞨侵北境 王帥勁兵 急擊大敗之 賊生還者十一二

 

온조왕(溫祚王) 4년(B.C 15년) 가을 8월 나라(樂浪)에 사신을 보내어 인사를 닦았다.

四年 秋 八月 遣使樂浪修好

 

三國史記 第 二十三卷(삼국사기 제 23권) 百濟本紀 第 一(백제본기 제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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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원동 도봉산 호암사 올라가는 곳에 위치한 ‘석경바위=‘자영경(自映鏡)’, 색경바위, 거울바위, 쪽 바위, 사과바위, 업경대(業鏡臺)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제가 어렸을 때 기차를 타고 서울을 오가다 보면 도봉산 중턱에 석경바위가 떡 하니 버티고 서있습니다. 의정부를 처음 방문하는 사람들은 그 석경바위의 웅장함에 깜짝 놀라며 무슨 바위냐고 물어보곤 했죠.

 

거대한 거울 하나가 공중에 떠 있는 듯, 의정부를 향해 빛을 비추는 듯 버티고 서있는 모습에 이방인들도 궁금증을 쏟아낼 수밖에요. 그만큼 석경바위는 의정부를 상징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신의 조형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직접 석경바위까지 올라가보니 그 웅장함, 그 신비함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수준이었습니다.

 

마치 우주인이 고인돌을 쌓아놓은 듯, 우주선을 띄워놓은 듯 아슬아슬하면서도 교묘하게 받쳐진 그 모양은 그저 감탄스러울 뿐이었습니다.

 

여러분 어떠세요. 오늘 오후에는 우리 2천 년 전 온조대왕님이 선택한 석경(石鏡)바위 자영경(自映鏡) 한 번 구경하러 휙 하니 둘러보고 오심은 어떨는지? 

 

 

【약력 소개】

교육학 박사. 

현) 세한대학교 사회복지상담학과 교수

현) 전국지명밟기운동본부 대표

저서: 『역사소년 신새날』, 『십대토론』, 『행복한 수다가 치매를 예방한다』

  

※ 본 기고문은 통통미디어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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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명박사의 지명밟기] ㉗ 온조대왕, 회룡분지 하북위례성 선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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