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05(일)
 

이동하 사진-가을겨울용 사진As.jpg

우리나라가 한류문화 선진강국이 되려면 예술을 정치적으로 유혹·회유, 오염·악용하면 안된다. 또한 예술을 자본화해서도 안된다.

 

골든글로브 남우조연상을 받은 오영수 배우 말처럼 ‘세계 속의 우리’가 아닌 ‘우리 속의 세계’로 우뚝 서려면 진정한 예술인들의 삶과 작품을 존중해야 한다.

 

문화도 고객 마음을 사는 마케팅이다. 오케스트라도 아트 마케팅 브랜드다. 그 중에서 베를린필이 으뜸이고 그 뒤 빈필, 그리고 뉴욕필하모니이다.

 

위기 때마다 살아 남았던 베를린필은 그야말로 명불허전이다. 19세기 음산한 베를린 악사들 호구지책을 책임져야 하는 악단이었다.

 

열악한 재정 속에서 어렵게 지내다 1886년 헤르만 벨프를 만나면서 재정 기반이 마련되었다. 베를린필이 공개 리허설을 도입하면서 오케스트라 대중화 시대를 열어 갔다.

 

19세기 말 상임 지휘자 한스 폰 뷜로의 뒤를 이어 30대 나이의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를 만나면서 베를린필은 전성기를 맞이했다. 그러나 1차 대전후 다시 위기가 닥쳤다. 독일은 나찌 시대를 맞이해 대중조작 위문공연에 동원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2차 세계대전 중 어린이부터 노인까지 동원되는 총력전 소집에서 베를린필 악단은 제외되는 특권을 누렸다. 전쟁 막바지 유태계 단원들은 탈출하게 된다.

 

전쟁이 끝난 1952년 푸르트벵글러가 다시 지휘자로 왔다. 그 후 카라얀을 종신지휘자로 베를린필은 제2의 전성기를 꽃피운다. 위기돌파라는 과감한 변화를 통해 베르린필은 세계 음악계를 평정한 것이다. 카라얀이 죽은 후, 이탈리아인 클라우디오 아바도는 악단의 민주화에 기여하였다.

 

다시 이야기를 히틀러 나찌 시대로 돌아가 보자. 1934년 푸르트 벵글러는 히틀러 문화정책을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히틀러는 인류의 적”이라고 한 것이다. 독일을 떠나려하자 가족을 인질로 삼겠다고 괴벨스가 협박하였다.

 

그러나 독일국민들 사랑으로 1935년 다시 지휘자로 돌아와 히틀러 앞에서 연주를 하였다. 히틀러를 쳐다보지도 않고 연주한 푸르트벵글러! 그는 17번이나 커튼콜을 받았다.

 

그의 ‘오만불손’한 태도를 문제삼지 않은 히틀러와 괴벨스. 그들도 음악을 진정코 즐긴 것인가? 아니면 권력유지 수단으로 이용하려 했던 것일까..

 

 

【약력 소개】

현재 (주)솔로몬경영개발원 마케팅연구소장입니다.

SK 마케팅개발원장과 고객관계경영본부장을 맡았고, 산업단지공단 중소기업 컨설턴트를 역임했습니다.

 

※ 본 기고문은 통통미디어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BEST 뉴스

전체댓글 0

  • 36096
비밀번호 :
메일보내기닫기
기사제목
[이동하의 통통세상] 푸르트벵글러 ·· 히틀러조차 어찌할 수 없었던 지휘자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