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04(토)
 

이동하 원본수정.jpg()이라는 것은 생산과 판매를 겸하는 시설을 뜻하는 말이라고 한다. 은점(銀店), 철점(鐵店), 옹기점, 유기점, 자기점 등이 이에 속한다. 또 판매 전문으로 하는 시설은 전()이라고 했다. 시전(市廛), 육의전(六矣廛)이 해당한다.

 

판매 전문으로 하는 시전은 상당한 구매 인구를 확보할 수 있는 서울, 평양, 개성 등 대도시에만 있었다. 조선시대는 하나의 상전이 하나의 물품만 취급하는 일물일전(一物一廛)이 원칙이었기 때문에, 여러 상전이 모여 있는 시전가가 형성되어 종합상가역할을 수행했다.

 

조선 후기 상업이 활성화되고, 종로 시전가 규모도 확장되었다. 상전을 늘려야 필요성이 생겨 공유지인 대로변에 세운 가건물에서 상품을 진열하고 팔았다. 이 가건물을 가가(假家)라고 했다. '가게' 어원이 바로 가가이다. 왕이 행차할 때는 대로변의 가가들을 철거하고 다시 설치해야 했는데, 백성들에게 부담을 주는 것이라고 나중에는 왕실에서 철거비용과 다시 설치하는 비용을 주었다.

 

서울 종로 대로변에 설치되어 있던 이러한 가가들은 1896년 한성정비사업에 따라 철거되었고, 이때 쫓겨난 상인들은 선혜청 창고를 대체가게로 분양받았다. 선혜청 창고자리가 바로 현재 남대문 시장자리라고 한다.

 

시전의 대표는 바로 육의전이다. 육의전은 중국산 비단을 취급하는 선전’, 국내산 면포를 취급하는 면포전’, 명주실을 파는 면주전’, 종이 파는 지전’, 모시 파는 저포전’, 건어물을 파는 내외어물전을 말했다.

 

육의전 중 가장 으뜸가는 상전이 선전이었다. 중국 비단을 수입해서 파는, 일종의 해외 명품브랜드를 수입해서 독점하는 명품매장이었기 때문에 출입하는 고객들도 당시 조선 최고위층이었을 것이고, 이문도 그만큼 많이 남았을 것이다.

 

선전은 임오군란 이후 중국상인들이 중국비단을 직수입해 팔기 시작하고, 갑오개혁이후 금난전권이 폐지되면서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한다. 선전이 있던 자리는 일제시기 '화신백화점'이 있던 자리이고, 현재 종로타워가 있다.

 

육의전 가게들은 복첩이 있었는데, 바로 단골손님 이름을 적은 수첩이라고 한다. 복첩이 두꺼울수록 단골손님이 많고 가게가 번성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복첩은 조상의 위패와 나란히 모실 정도였고, 그 단골손님 가운데 3대에서 7대까지 내려오는 단골손님인 경우가 허다했다. 육의전 가게들은 아버지가 자식에게 재산이 아닌 복첩을 물려주었던 것이다.

 

육의전에 제사가 있는 날 아이들이 느티나무 가지에 매달려 가지 끝으로 옮겨가게 했다. 바지가 벗겨지더라도 손을 놓을 수가 없었는데 이를 복가지타기라고 했다. 복가지타기란 단골을 잡으면 어떻게든 놓지 말라는 것을 가르친 교육이었다.

 

▣ 참고 : 전우용, 우리역사는 깊다1, 푸른역사    김영조, 아무도 들려주지 않는 서울문화 이야기, 얼레빗

▣ 출처 : 육의전 이야기, 자원순환사회연구소 

 

약력 소개

현재 ()솔로몬경영개발원 마케팅연구소장입니다.

SK 마케팅개발원장과 고객관계경영본부장을 맡았고, 산업단지공단 중소기업 컨설턴트를 역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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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하의 통통세상] 전통상인, 배울 점이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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