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9(월)
 

조병현박사 사진s.png

오늘 서울 서대문구 홍은동 13-78번지에 위치한 대종교총본사를 방문하여 개천(開天) 4479년 중광절(重光節) 선의식(襢儀式)에 참석하였다.

 

중광절은 음력 1월 15일로 1909년에 나철(羅喆) 선생이 단군대황조신위(檀君大皇祖神位)를 모시고 제천 대례(大禮)를 행한 뒤 단군교포명서(檀君敎佈明書)를 공포한 날을 기념하는 날이다.

 

중광이란 대종교의 교통(敎統)이 오랫동안 끊겼다가 다시 이어져 빛나게 되었다는 것으로 한배검(‘단군’을 높여 이르는 말) 은덕을 입은 광명세계가 다시 시작되었다는 뜻이다. 이 말 속에 한배검 가르침을 받드는 신교(神敎)가 비록 이름이 여러 가지로 바뀌었으나 끊임없이 이어져 내려왔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처음에는 한울임금 가르침이라는 뜻에서 한검수라고 하였고, 부여는 대천교(代天敎), 신라는 숭천교(崇天敎), 고구려와 백제는 경천교(敬天敎), 발해는 진종교(眞倧敎), 고려는 검교(儉敎)라 하였다.

 

이와 같이 단군교는 고대시대부터 단군을 시조(始祖), 국조(國祖)로 신봉하면서 명맥을 유지하였으나, 불교가 들어오면서 사찰 본당과 대웅전의 뒷켠 삼신각에서 간신히 잔명을 유지하고, 유교가 국교가 되면서 공자나 주자에 밀려났다.

 

기독교(천주교)가 유입되면서 '우상'으로 전락되었고, 일제강점기 때 국권회복의 구심체로서 부활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나 다른 민족종교와 마찬가지로 교세가 약화되어 안타까움을 더해 주고 있다.

 

민족종교는 1860년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가 제창한 동학교 개벽사상 영향을 받았거나, 단군을 신앙대상으로 삼고 일어난 한국에서 자생한 종교를 말한다. 수운이 보국안민을 제창했을 때, 많은 국민대중이 이에 호응한 것은 보국안민의 정신과 사상이 이미 한국 민간전승 신앙에 전해져 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동학 이후 민족종교운동이 하루 아침에 나타난 것이 아니라 고조선 이후에 꾸준히 발전되고 유지되었던 민간에 전승되었던 복합적인 신앙들이 이어졌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민족애가 종교적 신념으로 승화되고 보국안민이 종교적 실천이상으로 확립된 것이다.

 

일반적으로 민족종교는 동학교 계통의 증산교와 원불교, 그리고 국조 단군을 신앙대상으로 민족주체의식을 신념 기반으로 하는 단군계 종교로 구분한다. 이러한 민족종교는 역사주체인 민족이라는 자연집단과 그에 대한 사랑과 참여라는 민족애가 한국 민족종교의 역사적 실체를 이룬다.

 

일제는 민족종교를 말살하기 위하여 조직적인 탄압정책을 폈고, 유사종교(類似宗敎) 굴레를 씌웠다. 사실 대종교는 유사종교가 아니라 일제강점기 ‘항일운동과 민족혼교육의 요람’이다. 대종교총본사는 그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대종교는 항일 민족운동의 구심체 역할을 했다. 세상을 이롭게 하는 종교이면서 조선 민족을 하나로 묶어주고 조선 민족혼을 불타오르게 하였다. 만민평등과 세계평화를 추구하면서 조선 독립을 위해 조선 민족이 온 힘을 다할 것을 강조하였다.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개천절을 국경일로 정한 것만 봐도 당시 대종교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1918년 중국에 망명 중이던 독립운동지도자들이 발표한 대한독립선언서(무오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9명의 독립지사 중 25명이 대종교 출신이다.

 

간도 지역으로 총본사를 옮겨 중광단과 신민부(新民府)를 결성해 민정(民政)과 군정(軍政)을 아우르는 한인자치정부 성격을 띤 독립군단을 만들었다. 동경성(東京城)에 발해농장과 학교를 세워 조선민족의 독립운동기지와 교육 산실로 삼았다.

 

1921년 제2회 임시의정원 위원 29명 중 21명이 대종교인이었다. 학교를 세워 『신단민사(神檀民史)』와 『배달족역사(倍達族歷史)』 상해 임시정부 국사교과서를 편찬하여 민족주의사학을 가르쳤다.

 

민족종교는 광복 이후 근대화 과정에서도 민족주의가 발전 저해요인이라는 논리에 따라 많은 제약을 받았다. 다양한 어려움에 직면하면서 민족의 개벽에 대한 희원(希願)을 지켜 왔다.

 

대종교는 대한민국 6대 종교 가운데 제1호 종단으로 등록되어 교세확장을 위한 교당의 설치와 조직의 정비, 전국에 단군전의 봉안운동, 교적간행, 교단체제의 민주화를 이룩하였다.

 

아직 대종교 사상과 삼일원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지만, 삼회론(三會論)에 대해 총전교로부터 설명을 듣고 나니 왠지 마음이 편해졌다. 한배검과 임오십현(壬午十賢), 대종교인 독립운동가에게 경건한 마음으로 경배하였다.

 

독립운동가 70~80%가 대종교인이다. 오늘날 민족정신인 역사를 회복하기 위해 대종교인의 자취를 찾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4대 본사가 빨리 복원되길 기원해 본다.

 

 

【조병현박사 약력】

단재학당 교장, (사)영천미래연구원장입니다. 대한지적공사, 동국대학교 겸임교수, 대구과학대학교 교수를 역임했습니다.

장편소설 『간도묵시록』 저자이며, 북한 및 영토관련 논문 40편 발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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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현박사 역사칼럼 《단재생각》] ⑱ 독립운동가 70~80% ·· 대종교(大倧敎)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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